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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 위 32구 시신의 진실 - 오대양 피살 사건

미스테리&스릴 2021.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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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五大洋集團自殺事件)은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군(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북리의 오대양 공예품 공장에서 발생한 집단 자살 사건이다. 공장 내 식당 천장에서 오대양 대표 박순자(朴順子)와 가족, 종업원 등 추종자 32명이 집단 자살한 시체로 발견됨으로써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87년 8월29일 토요일, 가을을 재촉하는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용인군 남서면 북리 주(주) 오대양 용인공장에서 남녀 시체 32구가 발견되어 전국민을 경악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대양 용인공장의 공장장 이강수는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살해 있었고 오대양의 사장이자 세칭 오대양교의 교주로 알려진 박신자를 비롯하여 31구의 시체는 식당겸 다용도실 천장 바닥에서 목을 맨 채 누워 있거나 2, 3구씩 포개진 시체로 죽어 있었다.
이들을 목맨 것은 바지나 스커트를 가늘고 길게 자른 천이었다.


 

 

 

 


수사 결과 오대양 대표이자 교주인 박순자는 1984년 공예품 제조업체인 오대양을 설립하고,
종말론을 내세우며 사교(邪敎) 교주로 행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당시 48세로 많은 사채를 끌어들여 공장을 설립하고 종말론으로 신도들을 현혹했다.
'세상이 말세가 되었는데 오대양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전세계 오대양은 내가 주관한다' '오대양을 떠나면 죽음의 재앙을 받는다'라고 설파하여 신도들이 자신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게 만들었다.


특히 박순자는 자신을 따르는 신도와 자녀들을 집단시설에 수용하고,신도들로부터 17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사채를 빌린 뒤 원금을 갚지 않고 있던 중 돈을 받으러 간 신도의 가족을 집단 폭행하고 잠적한 것으로 밝혀졌다.

 

8월28일 한 채권자가 오대양 용인공장에 잠적되었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제보를 했다.
충남 경찰은 오대양 공장을 기습하여 어린이 19명 등 49명을 발견해 대전으로 데리고 왔으나 천장에 숨어 있던 박순자 등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여기에 있다.
오대양 공장을 기습한 경찰이 천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 박순자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박순자를 비롯한 31구의 시체가 외부에서 옮겨졌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집단 자살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보자면 


1987년 8월 29일, 오대양 직원 김 모씨는 용인의 공장에 왔다가 내려앉은 숙소의 천장을 보고 이상히 여겨 식당 쪽으로 갔는데, 식당 천장에서 죽어있는 박순자를 포함한 32명을 발견하고 마침 가족을 찾으러 공장에 온 박순자의 남편에게 알렸다. 그후 박순자의 남편이 경찰에 오후 4시 무렵에 신고해 집단변사가 세상에 알려졌다.

사건 현장을 발견한 사람들과 담당 형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천장 위의 상황은 단순히 참혹함은 물론 그 이상을 넘어 매우 기괴한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천장 위에 있던 빈 공간에는 속옷 또는 잠옷 차림을 하고 있던 시신들이 각각 이불을 쌓아놓은 것처럼 각각 19명,12명씩 쌓여있었고 그 먼 곳에는 공장장인 최 모씨가이 속옷 차림으로 서까래에 목을 맨 채 죽어 있었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공장장이 31명을 목을 졸라 죽이고 공장장은 스스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공장에 있던 사람들은 민속 인형 공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였지만 그것은 거짓이고 모두 종교 신도인들 이였다고 밝혀졌다.

그후 사건 현장 정리 도중 사망자들이 썼다고 보이는 메모들이 발견되었는데,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 갔다."라거나 "xx도 지금 매우 고통을 받고 있다.", "xx가 꿈을 꿨는데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들은 다 헤어지고..." 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으며 이 메모와 부검을 통해 사망추정 시각은 발견 전날과 발견 당일로 추정되었다.


메모 내용과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은 말못할 상황 때문에 처음에는 타살 가능성이나 사람들이 집단으로 음독하고 죽은 것이 아닌가 추측했지만, 경찰의 부검 결과 독극물은 나오지 않았고 대신 하이드라민이라는 신경 안정제 성분이 발견되었다.또한 시신들 모두 경부 압박으로 인한 교살이 사망 원인이었고 결정적으로 이들 모두 교살로 인한 저항 흔적이 아예 없었다는 것이 판명났다.

 

 

경찰의 추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오대양사건을 집단자살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사실상 명백한 살인사건이었다.
교주인 박신자는 집단 도피가 한계에 이르렀고 자살을 하자고 충동을 한 뒤에 먼저 자살을 하고 나머지 신도들이 뒤따라 자살을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31구의 시신이 전혀 반항한 흔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도 맞지 않는다.


천장에서 발견된 31구의 시신은 대부분 손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자의로 죽음에 동의했다고 볼 수도 없었다.
참고로 양손이 묶여 있는 시신이 5구, 양손과 양다리가 묶여 있던 시신이 3구, 양다리만 묶여 있던 시신이 여러 구였다.
치안본부 감식반은 박신자가 죽은 뒤에 박신자의 두 아들(24세, 22세)이 차례로 이들을 살해하고 자신들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보았다.
그들의 목을 맨 상처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대들보에 목을 매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대양의 공장장 이강수는 이들의 시체를 천장으로 옮긴 뒤에 자신은 대들보에 목을 맨 것으로 추정했다.
물론 이강수도 31명의 사람들 중 상당한 숫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교주인 박순자 역시 신도들과 함께 시체로 발견되는 등 관련자 전원이 사망함에 따라 수사는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고, 결국 광신도들의 집단 자살극으로 결론 내려졌다.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당시 뉴스데스크 보도 내용

 

 


이에 대해서 종교문제연구소장 탁명환을 비롯한 일부에서는 집단 자살로 보기엔 의문점이 많다는 의견과 함께 박순자를 비롯한 오대양 관련자들이 한때 몸담았던 '구원파'와의 관련설을 주장하였으나, 훗날 이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 후 1991년 7월 오대양 관련자 등 6명이 경찰에 자수하면서 또다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수자들의 진술에 따라, 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을 것으로 경찰이 추정하고 있던 오대양 총무 노순호와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 등 3명이 자살사건 전에 이미 계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오대양 직원들에게 살해당한 뒤 암매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사건이 전면 재조사에 들어갔지만, 이 사건이 경찰의 발표대로 집단자살극인가, 아니면 외부인이 개입된 집단 타살극인가에 대한 논의만 무성했을 뿐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부검 의사는 3구의 시체는 자살이 분명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교주 박순자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교살(絞殺)에 의한 질식사가 분명하며,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행해진 집단 타살극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경찰은

  가장 먼저 박순자가 공장장 이경수에게 자신을 교살시키고, 뒤이어 이경수를 비롯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교살시킨 뒤 박순자의 두 아들들이 철골 서까래에 줄을 매고 자살하고, 마지막으로 이경수가 목을 메어 자살했다고 판단했으며 사망자들이 스스로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즉 자의적으로 한 타살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사망자들의 사망 정황은 드러났다지만 이 사람들이 집단으로 왜 자살했는지는 명확히 드러난 바가 없었던지라 경찰 당국은 사건의 열쇠를 쥔 것으로 보이는 오대양 직원 11명을 공개수배했었다. 결국 1991년 7월, 수배 중이던 오대양 직원 중 6명이 자수하면서 대전지방검찰청에서 재조사되었고, 검찰 수사 결과 1987년의 경찰 수사와 동일하게 32명의 집단 자살 사건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오대양 사건은 미스터리다.
어쩌면 건국이래 가장 큰 미스터리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31명의 추종자들이 사장, 또는 교주의 지시로 자살, 또는 자살에 동의했다는 것은 한국판 '인민사원'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막대한 자금의 행방, 권력층과의 연계설이 나돌았고 충남도청에서 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남편이 무관하다는 경찰의 발표를 국민들은 믿지 않았다.
채권자들의 빛 독촉과 경찰의 추적이 동기라고 볼 수도 있으나 석연치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대양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8C%80%EC%96%91_%EC%A7%91%EB%8B%A8_%EC%9E%90%EC%82%B4_%EC%82%AC%EA%B1%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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